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에 노여움으로 말하네
-5•18 정태춘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 “화려한 휴가, 그날의 기록들”
•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도중에 연행하였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 하면서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리고,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으로 여겨 탄압한 불법 행위였습니다.
• 1980년 5월 계엄군 투입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하였고,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되어 민주화운동 세력을 제압해 버렸다.
• 1980년 5월 전남대 정문 앞 시위
5월 18일 10시 무렵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있습니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에게 폭언과 구타를 가하기까지 했다.
• 민주화의열망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스크럼을 짜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이러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적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 1980년 5월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고,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결국 발포하기에 이른다.
• 1980년 5월 학살, 계엄군의 집단 발포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고 광주시민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고,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2구가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났고 광주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 시민들은 계엄군이 주둔한 전남도청을 찾아 거세게 항의했지만 위정자와 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시민들은 군의 저지선을 넘었고, 계엄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 1980년 5월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
시민은 계엄군의 총격에 분노하여 자위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습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 속에서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며 승리감을 만끽하였습니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청소하였고, 흩어져 있던 시민군을 모아 재편성하여 치안을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 1980년 5월 광주 공동체
계엄군을 몰아내고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과 시내의 자치활동을 해 나갔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조작 보도하게 하여,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와 묵살하고 계엄군의 살인적 진압을 은폐시켰습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의 협상과정에서 내부 의견에 혼선을 갖기도 하였고, 계엄사 정보요원의 교란작전으로 인해, 협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 1980년 5월 최후 항쟁
계엄군과의 긴장이 계속되던 5월 26일 새벽,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맨몸으로 나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고 만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습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습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1996년에는 국가가 기념하는 민주화운동으로,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18 묘지가 국립5·18 묘지로 승격되어 그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1987년 6월 항쟁의 동력이 되어 민주주의 쟁취와 인권회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 5·18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중에게 귀중한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민주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지표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광주와 대한민국의 민중은 5·18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으며, 그 정신을 민주·인권·평화·통일 등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제기된 과제로까지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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