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전개과정
일본 패망 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얄타 등에서 이뤄진 국제 합의가 있었으나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한 미국과 소련 군정에 의해 한반도는 잠정분단 상태가 됨.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유엔 감시 아래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5월 북한은 조선헌법을 선포하고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북한의 남침(1950. 6. 25. ~ 9. 15.)
- 북한은 인민군 창설 후 소련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남침 준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 감행,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 함락.
유엔은 사상 최초로 집단 안전보장 조치에 따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유엔군 파병 결정. 미군 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해 1950년 7월 4일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던 한국군과 함께 북한군 저지.
8월 초 유엔군과 한국군은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해 방어 태세에 돌입.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1950.9.15~11.25)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힘입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 전쟁 발발 97일 만인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전쟁 이전 상황을 회복하는데 성공. 한국군 3사단이 10월 1일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고, 뒤이어 유엔군도 북진 작전 개시.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 점령.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0월 24일 유엔군이 청천강변에 도착하자 국경선까지 총추격전 독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또다시 바뀜.중공군 개입과 재반격(1950.11.25~1951. 06.23)
1950년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천-운산-온정리-희천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1차 공세 시작. 2차 공세(11월 25일~12월 24일)에 이어
3차 공세(12월 31일~1951년 1월 8일)로 38도선 돌파.
유엔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전략적 후퇴를 한 후 평택-삼척선까지 철수해 반격 작전을 준비하다 1월 25일 일제히 작전 돌입.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한 유엔군은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 다시 38도선 회복. - 교착전과 휴전(1951. 6. 23.~1953. 7. 27.)
- 1951년 7월 10일 미국과 소련이 휴전회담을 시작하면서 6·25전쟁은 회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한전 성격의 전투로 바뀜. 휴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이면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 입음.6·25전쟁은 발발한 지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 측의 미군 대표가 휴전 협정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마무리됨. 당시 한국 정부는 분단을 고착화하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서명에 참여하지 않음.
대한민국을 지켜낸 영웅들
호국보훈이란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선열들을 기리고 그에 보답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하여 그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고 보훈하는 문화를 북돋기 위해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6∙25 전쟁영웅을 선정해 알리고 있습니다.
김 신 공군 중장은 전쟁 직후 미군으로부터 공군 최초의 전투기를 인수하여 19회 출격하였으며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낮은 고도로 공격하는 전술로 북한군 보급로에 타격을 주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UN군 네덜란드 대대 지휘관이었던 오우덴 중령은 12월 강원도 횡성 지역의 혹한 속에서 후퇴하는 국군을 끝까지 엄호하는 작전을 펼치다 적군의 공격에 전사했습니다.
현시학 해군 소장은 정교한 함포사격으로 해병대의 상륙작전과 육군의 지상작전을 지원하였고 1951년 1월 황해도에서는 피난민 5,000여 명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터키 여단을 지휘한 타흐신 야즈즈 준장은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벌어진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무찔러 고지를 탈환했습니다.
김현숙 육군 대령은 전쟁 발발 직후, 대통령에게 직접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하였고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하여 여군을 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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