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세종대왕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한성부준수방 (지금의 서울 통인동 일대)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22살이던 1418년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지극한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한글반포, 과학기술, 문화 예술, 군사, 외교, 농경, 천문의 발달 등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
1. 유교정치의 기틀 마련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양성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해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2. 편찬사업의 융성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해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습니다.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 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하였다.


3.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유산입니다.


4.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으며, 인쇄술에서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5. 법전의 정비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정비된 시기였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남형(濫刑)을 금할 것, 주인을 살해한 노비는 반드시 관에 고해 시행하게 할 것, 도류(徒流) 죄인의 수속금(收贖金)이 과중하므로 빈민에게는 감면하도록 할 것 등을 정했으며, 옥도(獄圖)를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여러 차례 옥내(獄內)의 위생과 난방을 철저히 관리해 병들어 사망하는 일이 없도록 신칙하였다.


6. 불교에 대한 시책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 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 양종으로 병합했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세종대왕의 역사적 의의
세종대왕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 기반 위에 세종을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 또한 세종대왕의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